안전행정부(장관 유정복) 국가기록원은 광부·간호사 파독 50주년을 맞이하여 『반세기 만에 다시 울려 퍼진 독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독일 정부기관, 전문기록보존소, 사회단체 등에서 수집한 해외 희귀기록물 전시회를 12월 18일부터 12월 29일까지 서울도서관(舊서울시청)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이 2012년부터 최근까지 약 2년여간 독일 광산기록보존소「사회운동기록보존소」병원협회 등 독일 전문기록관리기관과 사회단체 등에서 수집한 총 25만여 매 중에서 엄선한 150여점이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험난한 독일생활 기록, 1960년대 이후 재독한인사회의 형성·발전과정 기록, 그리고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민간차원에서 시도된 한·독 교류 관련 기록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영상기록으로는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독일 도착과정과 광산·병원에서의 근무모습, 그리고 파독광부·간호사들의 인권 관련 독일측과의 논의모습 등 기존 영상에서 보기 힘든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파독 광부와 관련된 방대한 기록은 독일 광산기록보존소와 사회운동기록보존소 등에서 수집되었다.
먼저, 한국과 독일간의 광부 파견에 관한 협의과정 기록을 살펴보면, 1963년 4월 한국대사관이 독일 광산측에 한국광부 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독일광산측은 일본 광부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파견을 원한다면 한국인 광부를 고용할 용의가 있다고 답변함으로써 1963.12.16. 「한국광부 파견에 관한 한-독 협정서」가 체결되었다(【추가 설명자료 1, 2】).
1963~1977년까지 75회 총 7,936명의 광부들이 독일에 파견되었다. 출발당시 파독광부들이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서독행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이 이채롭다. 1963년 12월 21일, 제1진 123명은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 앵커리지를 거쳐 수십시간의 비행 끝에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하여 독일 각지에 있는 광산지역으로 배치되었다.
파독 광부들의 임금기록에 따르면 당시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13만원~19만원)였으며 이는 국내 직장인 평균 8배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파독 광부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은 기록들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파독 광부들의 탄광 실습 장면, 독일어 수업 광경을 비롯, 「광부광산근무시 지켜야할 수칙 안내문」부터 「광부작업복 제공 및 세탁 안내문」, 「신분증발급 안내문」등 탄광 내 광부들의 일상사 관련 기록,
그리고 파독광부들이 부당해고를 당하고 있다는 기사, 한국광부의 인권 관련 보도, 「한인자치회에서 저임금 등의 해결을 독일 노동조합에 요청하는 서신」등 힘겨운 노동현장 관련 기록들이 전시된다.
이 기록들은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추가 설명자료 3】).
파독 간호사 관련 독일병원협회 기록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파독간호사들의 병원내 다양한 생활모습과 「양로원에서 일하는 한인 간호원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다는 서신」(1973) 처럼 한국간호원들이 독일과의 문화적 차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 등도 소개되어 있다.
파독간호사들은 1966~1976간 총 11,057명이 파견되었으며 평균 약 800마르크(당시 원화가치 약 16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고운 한복 차림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앳된 얼굴의 파독 간호사들이 눈에 띈다.(【추가 설명자료 4】)
독일병원에서 만든「한국간호사들의 독일병원 적응을 위한 교육프로그램」(1974), 「독일병원협회와 한국개발공사 간 한국간호사 업무개선 회의」(1974) 등 한국간호사들이 독일병원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양국간 노력을 담은 기록도 확인되고 있다.
개인기증기록물 중에는 간호보조원으로 출발하여 무기한 계약서를 받고 수간호사로 임명되기까지의 일대기를 확인 할 수 있는 기록,
해방직후 간호대학 재학 중 발발한 6·25전쟁으로 간호장교로 입대하게 되고 이후 다시 파독간호사로 가서 생활하는 등 한국간호원 변천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록 등이 눈에 띈다.
한편, 이수길 박사 개인기증기록도 주목된다. 이수길 박사는 한국 간호사 파독의 산파 역할을 한 분으로 이번 전시회에서는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보낸다”는 ‘공문’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이수길 박사에게 보낸 개인 ‘서신’도 공개되었다.
1970년대 초반들어 점차 독일사회에 익숙해지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간 결혼이 많아지는 등 재독 동포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가 결합하여 새로운 가정이 꾸려지면서 2, 3세대가 형성되었고 이들의 교육을 위해 주말 한글학교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독일의 한국교민 수는 3만여 명이며 이중 12,000 여명이 광부나 간호사 출신이다.
이외에도 파독광부·간호사들이 발간한 『새활동』『재독간호』등의 잡지와 『교포신문』·『우리신문』창간호, 한글학교 교재, 민족문화학교 포스터 등 파독광부·간호사들이 이후 재독한인사회를 형성하는 과정과 관련된 기록도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IMF당시 조국통장 갖기운동 관련 기록, 위안부 문제를 독일사회에 알리는 사진기록, KAL기 피격희생자추모에 관한 기록 등 독일 광부·간호사들이 대한민국 정치, 경제, 문화적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냈던 기록도 확인되고 있다(【추가 설명자료 5】).
초창기 한-독관계 기록 중「독일 바이에른 수도원장이 독일 외무부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이후 1949년까지 원산 등 북한지역에 총 66명의 베네딕트수도원 소속 신부와 수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베네딕트신부 중 한명인 파비안담(Fabian Damn) 관련 기록도 처음 확인되고 있다. 파비안담 신부는 1958년에 김천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성의여자고등학교 졸업생 30명을 선발 서독병원에 간호학생으로 입학시킨 분이다.
이 외에도 1920~30년대 독일유학생들이 조직한 ‘유덕고려학우회’에서 일본의 폭정을 독일사회에 알리는 기록, 대표적인 독일지역 독립운동가인 이미륵을 필두로, 김법린·허헌·이극로 등이 1927년 벨기에 ‘세계피압박민족회의’에 참석하는 사진 등 파독 이전 민간차원의 한독교류 역사를 이해하는 기초자료도 확인되고 있다.
이번에 공개한 기록에 대해 이동기(강릉대학교) 교수는 “1883년 한독수교 및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차원의 교류가 해방후 공식적인 정부차원의 교류로 이어지는 과정을 복원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광산기록보존소·병원협회 기록은 독일 광산주와 병원측의 입장을 우리 광부·간호사들의 생활상 등과 종합적으로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분야 연구를 한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유정복 안전행정부장관은 “이번에 파독 광부·간호사 기록 공개를 계기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중남미 등 세계 각국에 산재한 재외동포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수집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담당 : 국가기록원 이강수(031-750-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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