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전후 재건으로 나라살림이 어려웠던 1950년대.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강의 기적’ 뒤에는 허리띠를 졸라맨 온 국민의 땀과 눈물이 있었지만, 아세안(ASEAN) 여러 나라들의 자발적인 도움도 큰 힘이 되었다. 이제는 아세안 여러 나라에 도움을 주면서 ‘신뢰’와 ‘행복’의 동반자가 되어 긴밀한 우호협력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11∼12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를 맞아, 12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한국과 아세안, ’신뢰’와 ‘행복’의 동반자”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12월 10일(수)부터 홈페이지(www.archives.go.kr)를 통해 서비스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소개되는 기록물은 전쟁의 아픔과 가난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아세안 여러 나라들의 노력과 정성이 느껴지는 동영상 19건, 사진 12건 등 총 31건으로, 1950~80년대 우리나라와 아세안 회원국 간의 교류·협력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아세안 국가들 대부분이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전쟁 중에는 피를 나눈 혈맹이었으며, 1950년대 전후재건 과정에서는 물적·인적 도움을 아끼지 않은 교류와 협력의 동반자였다. 1954년 12월 필리핀 병사들을 경무대로 초청해 훈장을 수여하는 영상은 필리핀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한걸음에 달려 온 진정한 우방국이었음을 보여준다. 1972년 주한 태국군 환송식 영상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파견 이후 22년간 4만여 장병이 주둔하다 귀국하는 고별식 모습으로, 그 동안 태국의 도움을 잊고 살았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1966년 경기도 파주 말레이시아교 개통식 장면은 다리를 건너는 일행 한가운데 두루마기 차림의 두 노인이 눈길을 끈다. 당시에는 교량이나 도로 개통식에 해당지역 최고령 어른이나 원로를 모셨다. 교량은 말레이시아 원조금으로 건설했지만, 준공식은 우리 식으로 치룬 셈이다.
아세안 국가들의 이러한 도움은 1960~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에 기여했고, 우리 제품과 인력을 찾는 아세안 국가들도 늘어났다. 1965년 카바이트를 태국에 수출하고, 1971년 석회를 베트남에 수출한 모습은 우리나라가 외화 획득에 얼마나 목말라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카바이트는 물을 부으면 가스가 발생하는 광물로 밤낚시용 등불이나 용접에 사용된다. 석회는 강원도 남부나 충북 북부지역에 매장량이 많은 석회암을 가공한 것으로, 내수에도 부족했지만, 그 보다는 외화가 더욱 절실했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1966년 ‘보다 넓은 세상으로’ 영상에서는 파월 장병과 파독 간호사·광부 뿐 아니라 태국, 베트남 등에 진출한 기술자들의 송금이 늘어나, 일반 서민들이 한국은행을 자주 찾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78년 인도네시아 수출 쌀 선적 장면은 당시로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보릿고개를 넘어 수출까지 할 정도로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고교 시절 혼·분식 검사 기억을 가지고 있는 50대 이상의 장년층이라면 공감가는 대목이다.
1960~80년대 우리는 아세안 각국의 도움을 고맙게 여기면서 이를 되돌려주는 노력을 함께 하였다. 1960년대 베트남에 기술훈련소를 만들어 직업훈련을 실시하고 농업기술단을 파견하여 농업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기록에서는 단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를 배우기 위해 찾은 아세안 각국의 인사들에게 발전 경험과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하려는 모습들이 돋보인다. 특히, 새마을운동을 따라 배우겠다는 개발도상국들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아세안 국가들은 물론, 아프리카와 남미지역 국가들까지 새마을을 배우려는 연수생들이 쇄도하고 있는데, 1981년 고위 공무원들이 다수 포함된 태국 새마을 연수단은 원조격인 셈이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우리나라와 아세안 회원국들 간의 교류와 협력에 관한 기록을 통해, 함께 성장·발전하는 동반자로 다시금 우호를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담당 : 국가기록원 김영지 (042-481-6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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