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작년 중부지역(경기·강원·충청) 판결문 발간에 이어, 올해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번 자료집은 영남과 호남(제주도 포함)의 3·1운동 전개양상을 소개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판결문 원문(原文) 50건(286명)을 번역문과 함께 싣고 있다. 그간, 판결문 원문은 한문과 일본어로 쓰여 일반인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번 자료집 발간으로 일반인의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남부지역 3·1운동 연구와 향토사학자들의 지역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료집은 총설과 판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에서는 3월 이후 전개된 영남·호남 지역별 만세운동의 생생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판결문에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지역의 독립만세 운동 준비와 전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에 헌신했던 분들의 꿋꿋한 의지와 용기 등 현장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독립만세 시위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외에도 교사와 학생은 물론 유생층까지 동참한 거족적인 운동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선 주인공들은 연령, 종교, 신분, 남녀를 불문하고, 상호 연대하여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까지 만세운동의 행렬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 만세운동의 구체적 사례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 보면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다. 밀양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윤수선과 윤차암, 강덕수, 박소수 등이 주인공인데, 이들은 당시 14~15세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 황정수, 김호용, 박칠성 등도 15~16세의 나이로 독립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밀양 표충사 승려(僧侶)였던 이장옥(李章玉, 27세)은 동료들과 함께 약 1,500명의 군중을 독려하여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기독교 장로파 영수(領袖)인 윤영복(尹永福, 26세)은 신도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영일 덕성리 장날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이끌었다. 통영의 기생조합(妓生組合) 기생 정막래(丁莫來, 21세)와 이소선(李小先, 20세)은 금반지와 금비녀 등을 팔아 같은 복장차림으로, 수천 명이 나선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탰다. 식민지 법원은 정막래에게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이 외에도, 청송의 조병국(趙柄國, 37세)은 화목동시장 독립운동에 말을 타고 군중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경북 영해의 서삼진(徐三辰, 29세)은 자전거를 타고, 앞뒤에서 군중의 만세운동을 지휘했다. 남원 덕과면장 이석기(李奭器, 41세)는 식수기념일(4월 3일)에 만세운동 취지서를 관내 면장들에게 보내는 한편, 800여 명이 참여한 시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동 적량면장 박치화(朴致和, 40세)는 면장직을 사직하고, 하동 읍내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남부지역에서 전개된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했다. 주도자들은 사전에 「독립선언서」, 「격문」,「경고문」, 「권유문」 등을 인쇄·배포하거나 공공장소에 붙였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만세운동 장소 근처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만세운동 당일, 일반 군중, 학생 등을 대상으로 태극기 배부, 독립 연설로 이어져 독립만세의 의지가 한껏 고조되었고, 깃발을 앞세운 행렬과 나팔을 불거나 징소리를 울려 시위의 분위기가 불타올랐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기세가 활발했던 것은 다양한 참여층의 굳건한 의지 때문이었다. 교사와 학생은 물론 승려, 목사, 관료, 농민, 노동자, 상인, 수공업자, 기생 등 연령과 신분을 떠나, 모두가 3·1운동 현장의 주인공이었다.
지역별 독립운동의 발화점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이었다. 물론 독립운동 주인공들은 사전에 충분한 논의를 하였고, 지역 장날에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이렇게 시장에서 시작된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일제 지배당국의 상징건물이었던 경찰서, 주재소, 군청, 우체국, 면사무소, 학교 등에 독립의 의지를 당당히 밝혔다. 이 외에, 산상(山上)과 들판, 포구, 역 광장 등에서도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밤늦게까지 계속된 산상(山上)의 독립운동은 거의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시위 군중은 마을 뒷산의 봉화(烽火) 신호에 따라, 횃불을 밝혀 만세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한편, 열차에 탑승한 승객을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은 특이한 사례로 주목된다. 경북 청도의 단산서당(丹山書堂) 학생이었던 이승덕(李承德, 18세), 최갑수(崔甲壽, 20세) 등은 경부선 열차에 승차한 군중들을 대상으로 철길 옆 나무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번에 소개한 판결문 외에도, 독립운동 판결문 관련 원문과 번역문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http://archives.go.kr) 「독립운동 관련 컬렉션」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인명은 물론 지역별·죄명별로 검색이 가능하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이번 자료집은 “남부지역 3·1운동의 구체적 전개 양상과 다양한 참여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을 담고 있으며, “특히 광복 70년을 맞아, 독립을 향한 강한 민족적 의지와 단결력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담당 : 국가기록원 박재완 (042-481-6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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