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한마디와 함께 솟구친 눈물은 스튜디오 뿐 아니라 온 한반도를 적셨다. 1983년의 한반도는 그렇게 기쁘고 안타깝고 간절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산가족이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한국방송공사(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 시작일(’83.6.30.)을 맞아, 6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로 정하고, 관련 기록을 29일부터 누리집(홈페이지, www.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한다. 이번에 제공되는 기록물은 총 30건(동영상 11 사진 16, 문서 3)으로, 이산가족 만남 실현을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들의 감격적인 상봉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 발발하여 3년간 치러진 6.25전쟁으로 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가 발생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피난길에서 머지않아 재회할 것으로 믿으며, 수 없이 많은 부모형제가 손을 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멈췄지만 이산(離散)의 아픔은 기약없이 지속되었다.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대한적십자사가 북측에 남북 이산가족찾기를 제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1971년 8월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남북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열 것”을 북한측에 제의하였고, 북한측이 호응하여 그해 9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수차례에 걸친 실무회의와 예비회담을 거쳐 1972년 8월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로 남북간 이산가족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 한국방송공사(KBS)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전파를 타면서 이산가족 상봉 장면은 온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남한 내 이산가족의 상봉 노력은 1973년 10월 27일부터 라디오방송을 통해 시작됐는데, 10여 년간 342가족이 상봉했다.
이산가족찾기의 분수령이 된 것은 1983년 6월 30일 시작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였다. 특별생방송은 이산가족들의 출연 신청이 쇄도하면서 11월 14일까지 계속됐으며, 5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이 소개됐고, 그 중 10,189건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삿짐을 날라주고 중매를 서 주었던 이웃사촌이 전쟁 때 헤어졌던 동생이었던 사연, 접수창구에서 몇 마디 주고받았던 할머니가 어머니였던 사연 등 극적인 만남은 온 국민을 눈물의 바다에 빠트렸다. 또, 마네킹을 세우고, 금관을 쓰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등 눈길을 끌기 위한 이색 노력도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더하게 했다.
그리고 미국, 일본, 중국 등 타국에서도 만남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이 줄을 이었다.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가 없던 당시 사할린 동포가 편지로 국내 가족을 찾은 사연, 재미(在美) 교포가 하얼빈에 사는 이산가족을 무비카메라로 찍어 한국방송공사(KBS)에 보내 국내 가족을 만난 사연 등 얼굴도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상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단일 방송프로그램으로는 세계 방송 역사상 가장 긴 시간(138일, 453시간 45분) 동안 불철주야 방송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이산의 아픔과 재회의 희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무산됐던 남북간 이산가족 상봉 노력도 재개되었는데, 1985년 드디어 남북 이산가족의 첫 만남이 성사되었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하여 가족과 상봉했다. 그 후 2000년부터 본격적인 상봉이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 총 19차례의 대면상봉과 7차례의 화상상봉을 통해 26,000여 명이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이산가족 상봉 노력을 담은 지난 기록을 보면서, 헤어진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그리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담당 : 국가기록원 콘텐츠기획과 김영지 (042-481-6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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