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80년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는 당시 기술력이 열악했던 철강, 중기계, 조선, 자동차 등 우리나라 산업계에 연구기술을 제공함으로써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핵심 산업기술 및 첨단 원천기술 개발에 주력하여 ‘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로 불리우며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구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1966. 2. 10.) 50주년을 맞아, 2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KIST 설립,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4일부터 누리집(www.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한다.
이번에 제공되는 기록물은 총 27건(동영상 8건, 사진 15건, 문서 4건)으로, 한-미 대통령의 연구소 설립지원 공동성명, 연구소 준공, 해외 한인과학자 유치 등 KIST 설립과정과 주요 활동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분야 종합연구기관인 KIST의 태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여 존슨 대통령과 회담 후,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 연구소 설립 지원을 합의했다.
그 해 7월 미국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고문인 호닉(Donald F. Hornig) 박사 일행이 연구소 설립의 기술지원 조사를 위해 내한하면서 연구소 설립이 가시화됐다.
KIST는 1966년 2월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 보장을 위해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되었고, 연구소 건물 신축과 우수인력 유치를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 종로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업무를 수행하던 KIST는 홍릉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로 선정하여, 1966년 10월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이 공포되어 정부재정 지원의 근거가 마련됐다.
시설 공사와 더불어 연구를 수행할 인력의 유치활동도 병행됐다. KIST는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를 위해 해외 한인과학자 유치에 힘썼으며, 18명이 1차로 연구소와 계약을 맺었다. 이들은 높은 급여와 주택, 자녀의 취학 편의 제공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1969년 10월 연구소 건물의 준공으로 KIST는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했으며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에는 선진국 기술을 활용하여 폴리에스터 필름, 동복강선(銅覆鋼線) 등을 산업계에 보급하였다.
또한, 정부와 기업에서 요구하는 연구과제와 기술개발을 수행함으로써 국가산업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에는 반도체 소재, 광자기디스크 등 첨단기술을 개발하여 우리나라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미래산업을 대비한 기초기반 기술과 원천기술 개발에 힘썼다.
KIST의 성공적 운영 사례는 다수의 정부출연 연구소 발족으로 이어졌고, 한국선박연구소, 해양개발연구소,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 특수 전문 연구기관들이 KIST에서 분화·발전하며 우리나라 연구 개발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KIST의 설립과 활동 관련 기록을 통해 산업과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담당 : 국가기록원 콘텐츠기획과 조이현 (042-481-6381), 신경훈 96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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