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갑 발주기관·2차 협력사·근로자 보호는 게걸음
#1. 중소건설사의 A사장은 B지자체의 강권에 못 이겨 시공 중인 공사를 전직 공무원인 C사장에게 하도급을 줬다. 공사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완공 6개월이 지난 직후 C사장이 불법 일괄하도급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협박했다. 지자체 담당자를 찾아 하소연했지만 ‘좋게 해결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분쟁조정기관까지 불려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과징금을 고려할 때 합의가 낫다는 말만 들었다. 너무 억울해 조정을 거부한 A사장은 공정위 조사를 기다리는 처지다.
#2. 창립 13년차인 김해 소재 D사는 25억여원의 상가를 신축하던 중 건축주가 대금지급을 거부함에 따라 부도 위기에 몰렸다.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공사를 수행하기 위해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작년 8월에 이미 전 직원이 퇴사한 상태다. 하도급사들이 기존에 진행 중인 관급공사 2건과 건설고제조합 보증가능금액확인서에 대한 가압류까지 설정하면서 공사수행도, 신규 수주도 불가능해졌다. 신축상가 경매순위에서도 3순위로 밀려 대금 회수마저 어려워지자 신보는 폐업을 종용했다.
극단적 사례처럼 보이지만 건설업체들 사이에서는 흔히 겪는 일이다.
A사장은 “다른 사장들에게 사정을 털어놨더니 비슷한 경험을 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며 “변호사 자문비 등 금전 문제를 떠나 2년 가까이 받은 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최근 한 건설단체의 현장소장 간담회 참석자들도 “발주기관의 하도급계약 체결 강요는 여전하다”며 “요구를 거부하면 사업을 접어야 하는 반면 강요한 하도급사들이 늘 문제를 일으키면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감사 등에 적발되더라도 하도급을 강요한 공무원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아예 대행하는 브로커까지 횡행한다는 귀뜸이다.
최저가낙찰제와 실적공사비로 대표되는 무분별한 공사비 삭감과 발주기관의 귀책 사유로 인한 공기연장임에도 불구하고 손실액(건협 집계 92개사 4205억원) 보전을 외면하는 등 횡포가 만만치 않지만 그나마 공공발주기관은 양반들이다.
민간발주기관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한건설협회가 업체들로부터 취합한 민간공사 불공정사례는 유치권 불인정, 과도한 준공·기성금 지급기한 약정, 시공보증 및 계약보증금 과다 요구, 지체상금 과다 책정, 준공금 지연이자 불인정 등에 이르기까지 기법도 다양한다. 건협의 254개사 설문에서 대금을 지급받지 못했다는 건설사만 100곳(53%)에 달했다. 정부 차원의 유일한 안전장치인 표준도급계약서 사용 응답도 55%에 그쳤다.
발주기관의 대금지급이 부적정하거나 제대로 안 되면 그 피해는 원도급사를 넘어 하도급, 2차 협력사, 건설근로자까지 연쇄적으로 미치지만 경제민주화 정책은 ‘발주기관-원도급사-하도급사-자재·장비업체·건설근로자’로 이어지는 다단계 생산구조 중 원하도급 관계에만 매몰됐다는 게 건협의 비판이다.
관련 법안처리만 해도 ‘슈퍼 갑’인 발주기관의 이런 횡포와 2차 협력사·근로자에 대한 하도급사 의무를 감시할 대안들은 게걸음이다. 이로 인해 하도급사 부도로 인한 2차 협력사·근로자의 대금·임금을 대신 내야 하지만 보증은 무용지물이다.
발주기관 횡포를 완충할 건설 관련 법안도 이이재 의원이 발의한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과 김희국 의원이 발의한 ‘국가계약법 개정안’이 고작이지만 이달 국회 처리는 물 건너갔다. 생산체계 최하단의 2차 협력사와 근로자 보호법안은 발의건수는 많지만 처리된 것은 건설기계 대금지급보증제 도입안을 담은 건산법 개정안이 거의 유일하다. 나머지 법안들은 부처간, 상임위간 이견 등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최근 남양유업 사태와 속칭 ‘라면상무’, ‘빵 사장’ 등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마녀사냥’식으로 번진 경제민주화 파고가 원하도급 관계 개선을 위한 정책에만 쏠리면서 종합건설사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건협 관계자는 “원하도급 관계에 집중된 경제민주화 정책이 2차 협력사와 건설근로자로 전이되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속도를 못 내고 있고 발주기관 수술문제는 아예 주목받지 못해 안타깝다”며 “건설산업의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일궈내려면 생산 단계의 모든 주체가 양보해야 하며 특히 파급효과 면에서 최상단의 민간발주자 수술이 가장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국진기자 ji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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